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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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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3-08-29 22:28 조회 5,549 댓글 0
 

아펜젤러순직기념관 / 선교뉴스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포구에 갔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량진 포구에 한국최초(1816년)의 '성경전래지'가 있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은둔의 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첫발을 디뎌,
커다란 업적을 남긴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기념관이 거기에 있었다.
 
한국에 공식적으로 파송된 첫 선교사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두 선교사가 함께 인천항에 첫발을 디뎠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로서 파송을 받았다.
그들은 쇄국정책의 어려운 환경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먼저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1885년 우리나라 신교육의 효시가 된 배재학당을 세워
교육사업을 시작하였고, 나중에 정동제일교회 설립, 독립활동 지원,
신약성경 한글번역 등 한국교회 초기 역사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1902년 6월 어청도 해역에서 선박충돌 사고로 요절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군산 앞바다에 있는
오식도로 알고 있었는데, 서천 앞바다에 있는 어청도(일본발음 오세이도)
라는 사실이 새롭게 검증되어(마량리에서 약 48km, 군산에서는 약 72km),
그곳을 육안으로 전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육지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정교회 옆에 세워진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기념관,
그는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나 무덤 하나 남기지 않고 서해안에 수장되고 말았다.
 
한국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1858~1902)
약관 27세 신혼에 한국에 와서 44세에 순직할 때까지 17년간 봉직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지하1층에 있는 전시관
 
조선말기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개화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조선 정부는 민영익, 홍영식, 서광법 등 개화파 정치인들을
미국으로 파견해 보빙과 서양문화 시찰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연한 기회에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게 되었다.
 
미국 감리교회의 시작이자 한국선교의 출발지 러블리 레인 교회와 가우치 박사,
동양 은둔의 나라에 대한 가우치 박사의 관심과 지원이 한국선교의 시발점이다.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가우처대학의 학장이었던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가 민영익 일행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한 옷차림의 한국사절단에 호기심과 관심이 생긴 가우처 박사는 이들에게
말을 걸게 되었고, 동양의 은둔국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 후 본격적인 실행계획을 추진해 아펜젤러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당시 서양귀신(양귀자)이라는 조롱을 받아가면서도,
조선의 약자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복 입은 아펜젤러
 
1881년 해외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아펜젤러는 결심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 선교사 파송,
갑신정변 후유증으로 정정이 불안할 때 아펜젤러 부부는 목숨을 걸고 한국에 입성했다.
 
은둔의 땅 조선을 사랑했던 아펜젤러 부부의 활동
한국에서의 17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아펜젤러의 위대한 업적 : 성서번역과 교육선교(배재학당 설립 등)
 
영어학교로 출발해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집)'
교명을 받았고, 교훈은 "欲爲大者 當爲人役"(크고자 하거는 남을 섬기라) 
1885년 최초로 설립된 미션스쿨 배재학당에서 본인도 세례를 받았다.
 
한국최초의 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 설립과 지역선교,
서울에서 교육과 의료사역을 주로 했지만 지방 선교여행도 자주 다녔다.
 
신약성경 번역과 묘축문답 등 문서선교를 위한 삼문출판사 설립,
아펜젤러의 문서선교는 주로 삼문출판사를 통해 이뤄졌다.
 
서재필, 이승만 등 배재학당 출신자들의 독립운동 기여,
'신교육의 발상지' 배재학당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성경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항에서 목포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해에서 일본선박 구마가와마루호(모형)와 기소가와마루호 충돌,
 
수영을 잘하던 아펜젤러는 혼자 살 수도 있었으나, 동행했던 조한규와
방학을 맞아 귀향하던 정신여고 학생을 구하려다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조선을 사랑했던 그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인간애'를 실천했다.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보는 어청도 전경
여기가 아펜젤러 순직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라고 한다.
 
해가 지는 마량진 포구는 한국최초(1816년) 성경전래지다.
석양에 해가 서서히 사라지고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다.
 
순교기념관 1층에 선교와 순교에 대해 기념하는 흔적을 남긴다.
여기에 방문한 이들이 잠깐만이라도 생각을 정리해보게 된다.
 
"복된 소식을 이 땅에 전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되새깁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기념관을 지키고 계신 '동백정교회' 남광현 목사님,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서천군 서면 마량리 251-1), 방문안내 041-952-2224 
 
순교 기념관은 당시 파선된 배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새로 지은 동백정교회와 예전교회도 아직 남아있다.
 
마량진 포구는 뜻깊게도 '한국최초 성경전래지'로 의미가 깊다.
시신도 남기지 않은 '처음 선교사 아펜젤러'의 정신도 남아있다.
 
중국으로 가던 영국함선이 한국 서해안 탐사를 하고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달,
1816년 영국 함선이 여기에 와서 성경을 전해줬다는 자리에 성역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성경전래 기념비' 바로 옆에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하늘이여, 바다여, 파도여, 님은 이 나라와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는데..."
 
비석의 뒷면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약력이 기술되어 있다.
 
* 김석영 지음, '처음 선교사 아펜젤러'(도서출판 kmc, 2011) 참고
 
서해안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마량리 포구,
 
천연기념물(제169호) 동백나무숲이 있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의미있는 지역의 역사성이 잘 보존되어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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